캄보디아는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대내외적인 정치적 풍랑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이러한 격랑의 신호탄은 1965년 5월, 반미노선을 취하던 노르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 국왕이 미국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불교사회주의 정책을 앞세워 국가 경제의 주요 부문을 국유화함으로 나타났다. 시하누크 국왕은 1941년, 당시 19세의 나이로 캄보디아 국왕으로 즉위하였으며, 1953년 11월에는 프랑스로부터 군사 사법 외교권을 허용받음으로 사실상의 독립을 이루었는데, 이후 1965년까지 약 10년 동안의 평화롭고 조용했던 시기를 스스로 박찬 것이었다. 이러한 시하누크 국왕의 경제 실정(失政)은 베트콩(Viet-Cong, 베트남 남부에 기반을 둔 친 공산 성격의 게릴라)으로 하여금 캄보디아 내에 기지를 건설하면서 공산화 통일을 위한 전쟁을 시작하도록 만드는 빌미를 주었다.

▲ 따크마으 성경학교의 학생들(1950년대 말)

1953년, 독립과 함께 공포된 캄보디아 헌법에는 종교와 예배의 자유를 허용하였으며, 1954년, 시하누크 국왕은 특별히 제본한 캄보디아어 성경을 내놓는 등, 캄보디아 안에 종교와 예배의 자유가 있음을 천명하였다. 물론 이때는 개신교가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바탐방에서 따크마으로 이전 후, 일시적으로 문이 닫혔던 성경학교에는 다시 문을 열었고, 기독교 문서의 필요성 때문에 캄보디아 최초의 복음 출판사가 생겼으며, 여기에서 기독교 잡지, 통신 교재 및 강의 자료를 비롯한 다양한 책과 전도지가 출판되었다.

기독교 라디오 방송이 소개되어 캄보디아에서 만든 테이프를 필리핀 극동방송국에 보내어 방송 선교를 하였으며, 이 결과 캄보디아 교회의 지평이 넓어지고, 아시아의 다른 전도자나 교회 지도자들과의 연락이 가능해졌다. 캄보디아 내 산지에 사는 수천 명의 부족민과 베트남 남부 국경의 크메르 끄라옴에 대해서 선교적 책임을 갖게 되었다. 기독 청년과 여성 기관들을 세워 더 효과적으로 이들을 교회에 연결시키려고 했다. 또한 이 시기에 홍콩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프놈펜과 바탐방에 중국인 교회가 세워졌다.

1965년, 미국인 선교사들의 출국 이후에는 개신교도들이 새로운 정치 세력을 형성하고 정부를 더 이상 따르지 않을까 두려워한 정부에 의해 종교와 예배의 자유가 제한되었다. 독립적으로 활동하던 프랑스인 쟝과 로슬린(Jean and Roselyne Clavaud) 선교사는 KEC(Khmer Evangelical Church)와 연계하여 사역하였으며, 또 다른 프랑스인 뿌네(Funes) 선교사 부부도 캄보디아에서 계속 사역을 하였다. 1965년 이후의 캄보디아 교회는 작지만 탄탄하게 성장하였다.

C&MA 선교사들은 캄보디아에서 40년 넘게 선교 활동을 하였지만, 기독교인의 수는 아직도 전체 인구의 0.1%를 밑돌았다. 그래도 시골보다 도시에서 복음 전파와 교회 성장이 드러났는데, 1965년 기준으로 700명의 세례 신자와 2,000여 명의 교인이 있었으며, 1968년 기준으로 KEC에는 약 12명의 목사가 사역하였고, 교회 수는 약 1,000개로 늘어났다. 교회 신도들은 대체로 저소득층으로 구성되었다./장완익 선교사 (캄보디아교회사연구원장)

▲ KEC의 유스 리더들(1956년)